혹시, 괴물이세요? 잔혹한 현실의 ‘스위트홈’
김미성   ( 2018-10-19 17:05:02 )
2018-10-19 17:05:02
초기화






어느 날 사람들이 하나둘 ‘괴물’이 되어간다. 초기에는 몸에서 피를 쏟으며 눈이 빨개지고 공격성이 강해진다. 괴물화 초기에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죽일 기회’를 놓치면 인간의 외양을 잃고 영락없는 괴물의 모습이 된다. 괴물이 된 사람들은 쉽게 죽지 않는 신체 능력을 갖추고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고 외부로부터 구조의 손길은 요원하다. 세계는 이미 괴물에게 장악당해 망해버린 것 같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또 누가 괴물이 될지 몰라 두려움에 떨며 살아남을 방법을 모색한다.


좀비 아포칼립스의 도입부가 아니다. 네이버 인기 웹툰 ‘스위트홈’의 도입부이다. 세상이 대충 망하고 식량도 부족한 채 아파트에 고립되어 있고 층층이 괴물이 돌아다니고 아직 인간인 사람 중에서도 누가 또 언제 괴물이 될지 모르는 이 이야기에는 너무 스위트한 제목이다. 주인공 ‘차현수’의 집도 만약 부동산 중개인에게 ‘스위트홈’이라는 소개를 받고 입주했다면 단단히 사기를 당한 수준이다. 방음은 옆집 똥 싸는 소리까지 들리고 주민의 대부분이 괴물이라니 스위트하지 못한 것도 정도가 있다. 소득이 없는 열여덟의 나이, 주인공만 남기고 사고로 죽은 가족들, 아무도 손 뻗어주지 않는 친인척들, 1년도 버티지 못할 남은 재산, 마음의 병으로 방 안에 틀어박혀 버린 히키코모리 주인공. 점점 더 제목은 반어법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 주인공 차현수는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의 극장판만 보고 자살할 계획으로 집안에 틀어박혀 지낸다. 주인공이 집 안에 고립되어 있는 동안 바깥세상에는 ‘괴물화 바이러스’가 퍼져서 주인공만 살아남는 이야기가 되는 걸까? 그래서 ‘스위트 홈’인 걸까? 애석하게도 그런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간다. 주인공은 괴물화 사건의 발생 초기에 당당하게 감염되시고 만다. 참으로 ‘스위트’하기 짝이 없다.




일반적인 의미의 ‘스위트 홈’은 ‘편안한 곳’ ‘화목한 가족이 함께하는 곳’을 의미한다. 하지만 차현수의 현실 세계의 ‘스위트 홈’은 이미 부서져 버렸다. 과거는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고 미래는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는다. 현실을 포기한 차현수가 세상 밖과 연결된 것은 24인치 모니터뿐이다. 그 속에서는 도덕이 필요치 않고 진실도 필요치 않다. ‘일그러진 욕망의 세계’에서 꾸며내는 원하는 자신의 모습이 곧 자신이다. 그곳에서는 이미 부서진 ‘스위트 홈’도 창조할 수 있다. 어떤 욕망도 이루어지는 세계. 어느 날부터인가 그와 비슷한 가상의 환영이 사람들의 내면으로부터 목소리를 내어 유혹한다. 이 ‘스위트 홈’에서 행복해지자고. 얼마든지 네가 원하는 욕망대로 충실하게 살아가자고. 내면의 유혹에 응한 사람들은 욕망에 충실한 괴물이 된다. 제목의 의미는 상당히 명확해진다. ‘스위트 홈’은 정말로 달콤한 욕망의 세계였다.




좀비에게는 의지도 없고 생각도 없다. 썩어가는 공격적인 몸뚱어리일 뿐이다. 하지만 ‘스위트홈’의 괴물들은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내면의 유혹에 긍정의 응답을 한 자들이다.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좀비가 되는 것은 좀비에게 물리는 것이나 오염된 물 섭취를 피함으로써 막을 수 있지만 이 ‘괴물화’는 그런 방법으로는 막을 수 없다. ‘감염’의 경로가 없고 정체도 모르며 오직 자신의 정신력으로 자기 자신의 욕망과 싸워 이기는 것만이 방법이다. 괴물들의 질문은 명확하다. 




욕망이 전혀 없는 인간은 없다. 간절한 욕망을 미끼로 내거는 것부터 괴물들이 이긴 싸움이나 다름없다. 괴물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환영은 차현수가 몰입해 있던 가상공간과 닮아 있다. 욕망이 없는 인간은 없기에 괴물화의 ‘당첨’을 확실히 피할 방법도 없다. 괴물은 숙주가 강하게 바라는 욕망을 가상으로 이루어주는 대가로 그 인간의 현실을 받아간다. 거짓된 ‘스위트 홈’을 받아들일 때 현실의 인간은 괴물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다이어트를 위해 식이 조절을 하던 여성은 아귀 괴물이 되고, 근육을 만들고 싶어 하던 남자는 근육 괴물이 된다. 살아남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죽기 전에 눈에 보이는 위협적인 것들을 먼저 찢어 죽이는 괴물이 된다.




그렇다면, 죽기 위해 자살 날짜를 휴대전화 알람으로 정해놓은 18세 소년의 욕망은 ‘죽음’일까? 아니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의 극장판을 반드시 보는 것일까? 주인공 차현수가 정말로 바라는 것은 어떤 ‘스위트 홈’일까? 무엇이 자살하려던 소년으로 하여금 필사적으로 싸우게 만드는 것일까? 주인공과 함께 자신의 내면의 괴물과 대화하고 싸우며 자신의 욕망을 한 번 직시해보는 기회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괴물이 되지 않은 사람들은 어째서 괴물이 되지 않았는지, ‘나라면’ 어떻게 할 것 같은지. 그것을 생각해보는 것이 ‘욕망’을 전면 키워드로 내세운 채로 이 작품이 하고자 하는 또 다른 이야기에 대한 대답의 단초가 될 것이다. 애초에 이 이야기에서,


“괴물이란 무엇인가?”


기괴한 모습을 한 존재일까? 인간을 공격하는 존재일까? 아이를 구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변이한 사람은 ‘괴물’일까 ‘인간’일까. 괴물화가 발생하기 전에도 오랜 세월 아내를 때리고 가스라이팅하고 윽박지르고 개처럼 부린 사람은 ‘인간’일까 ‘괴물’일까. 약자에게 뻗은 도움의 손길을 폭력으로 되돌려 주어 타인의 인생을 망가뜨린 사람들은 ‘인간’일까 ‘괴물’일까.






‘괴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역으로 ‘인간답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누구나 괴물이 될 수 있다. 또한 괴물이 되고자 하는 욕망과 싸워나간다면 괴물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괴물이 되느냐 인간으로 남느냐가 ‘인간이고자 하는 의지’에 달려있다면 ‘무엇이 인간인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극한의 상황에서, 미래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인간’이기 위해 우리는 마지막까지 ‘무엇’을 포기하지 않아야 할까? 






본래 우수하고 밝은 아이였던 주인공 차현수는 ‘인간답게’ 행동한 대가로 인간의 모습을 가진 ‘괴물’들에게 미래를 빼앗기고 폐인이 되고 만 아이다. 괴물화 재난 속에서 차현수는 거미줄에 걸린 초파리 한 마리를 보게 된다. 꼼짝없이 거미의 먹이가 되어 죽을 미래밖에 남아 있지 않은 초파리는 현재의 막막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차현수 자신의 처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소용없다’ ‘발버둥 쳐도 죽을 수밖에 없다’라고 생각했던 초파리는 살기 위해 발버둥 쳐 거미줄로부터 벗어난다. 




차현수는 거미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미래가 안 보이는 세계에서 차현수가 ‘살아가야 한다는 두려움’과 어떻게 싸우는지. 괴물화가 진행되어 가는 과정에도 마지막까지 인간이기 위해 어떻게 다시 일어나 맞서는지. 주인공의 고민과 투쟁을 함께 지켜보도록 하자.


[김미성]
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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