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리뷰
[1억2천 BL도감] #1 『피와 불의 노래』
by 관리자
2017-08-18 09:09:44



1억2천 BL도감 

#1 『피와 불의 노래』


불과 5년 전만 해도 보이즈 러브 만화를 온라인에서 당당히 돈 주고 사볼 수 있게 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BL 웹툰 전문 플랫폼이 들어서고, 음지의 존잘님들이 프로로 데뷔하는 시대. 대한민국은 생각했던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커지고 있다. 이제는 당당히 외치자. BL 만화 보는 게 어때서? 1억 2천, 전부 BL이다!

 


 


『피와 불의 노래』, 이리, 레진코믹스


 


BL의 세계에서, ‘취향’이란 너무나 오묘하다. 세상에는 70억 인구수만큼이나 다양한 취향이 있고, 그것은 개인마다 각기 다른 지점에서 오르가즘의 스위치를 작동시킨다.


테라단위의 외장하드를 야동으로 꽉 채우고도 여전히 부족함을 느끼는 이들과 같이, BL 독자들도 취향에 맞는 창작물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서점과 온라인을 서성인다. 문제는 BL계도 빈익빈 부익부라는 것이다. 아직 서브컬처 창작 시장이 크게 자리 잡지 않은 한국은 특히 그렇다.


배경도 일상적이고 등장인물도 평범한 쪽을 좋아하는 이들은 딱히 부족함 없는 덕질 라이프를 영위하겠지만, 마이너의 세계는 냉혹하다. 마니악하고 하드한 취향의 독자들은 취향저격은커녕 엇비슷한 작품 찾기도 어렵다. 마르코 폴로된 마음으로 혼자 개척하든지, 창작물이 넘치는 풍족한 장르를 찾아 취향 개발에 나서든지 선택해야 한다.


그래서 레진코믹스의 『피와 불의 노래(이하 『피불노』)』 같은 작품은 반갑다. 이 만화를 서비스하고 있는 레진코믹스는 『피불노』의 메인 페이지에 ‘중년의 아름다움과 근육의 경건함을 아는 당신께 바칩니다’라고 써두었다. 그렇다. 『피불노』에는 무려 ‘글래머러스한 중년 떡대수’*가 등장한다. 게다가 그는 ‘꼬리’와 ‘뿔’이 달린 ‘정령’이다. ‘떡대수’ 자체가 마이너는 아니지만, ‘중년’, ‘떡대수’, ‘판타지’ 등 여러 가지 필터를 겹쳤을 때 살아남을 작품은 흔치 않다. 레진코믹스 BL 랭킹을 보라. 절대 다수가 학교, 회사를 배경으로 한 일상물이다.


 



『피와 불의 노래』 중에서. 주인수 비스누트의 강렬한 등장.

 


왕립소환학교의 견습소환술사 시르카는 정령 소환에 번번이 실패한다. 퇴학당할 위기에 처한 시르카는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불의 정령왕 비스누트를 소환하는 데 성공한다. 비스누트는 갑작스러운 소환에 황당해 하지만, 스승님에게 같이 가서 정령 소환을 증명해 달라는 시르카의 부탁을 들어준다. 학교에 간 비스누트는 시르카가 금지된 마법서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안 뒤 화를 내고 사라진다. 거칠지만 아름다운 비스누트에게 홀딱 반해버린 시르카는 목숨을 걸고 다시 그를 소환한다.


『피불노』를 그린 ‘이리’는 동인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결 같은 취향의 작품을 선보여온 작가다. 『피불노』 이후 레진에서 연이어 발표한 『당신의 손을 잡아도 될까요?』와 『그래도 늑대와 곰』 역시 중년 떡대수와 (수에 비하면) 비리비리한 청년공 구도를 택하고 있다. 플롯은 ‘우연한 만남-공의 일방적인 구애-섹스’를 중심으로 대동소이하다. 대신 작가는 각 작품의 세계관을 꽤 세심하고 다양하게 구현한다. 작화 완성도도 높다. 소년 만화처럼 배경과 소품을 대단히 풍성하고 꼼꼼하게 제시한다.


 


『피와 불의 노래』는 단편이지만 나름의 판타지 세계를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배경이 아름답다.

 


무엇보다 독자의 시선을 압도하는 것은 주인수의 육체미다. 보디빌더를 연상케 하는 마초적인 몸은 약간의 여성성도 허락지 않는다. 『피불노』에서 비스누트가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며 등장하는 장면은 설령 떡대수가 취향이 아니라 할지라도 잠시 할 말을 잃게 만들 정도다. 반면 공은 수보다 키도 작고 몸도 말라 볼품없다. 대신 그는 중년 남자에게도 서슴없이 “예쁘다”, “아름답다”를 연발하는 변태상남자이자 자기 허리만한 굵기의 다리를 홱홱 넘겨가며 카마수트라를 재현하는 괴력의 소유자다. 그의 능글맞은 도발은 수도 당황하고, 읽는 이도 당황시킨다. 그러다 어느새 정신 차려보면 둘이 뒹굴며 헉헉거리고 있다! 그 구렁이 담 넘어가는 듯한 연출에 무릎을 꿇지 않을 도리가 없다.


 


미인을 얻으려면 시르카처럼!

 


『피와 불의 노래』는 결코 아무에게나 추천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당장 레진코믹스 BL 랭킹에서도 100위권 밖이다. 그러나 중년 떡대수의 매력이 무엇인지 궁금한 이에겐 거리낌 없이 권하겠다. 누군가는 몰랐던 취향에 눈을 뜰 수도 있으니.


아직 마이너 취향들에겐 척박한 한국 BL 시장에서, 『피불노』가 상업BL로서 당당히 등장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앞으로 더 다양하고 마이너한 작품들을 기대해 본다.



<출처: 에이코믹스 https://acomics.webtoonguide.com/archives/34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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