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인문학도가 읽는 웹툰 ④-完 <CIRCLE OF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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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ssida
2018-03-03 16: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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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웹툰 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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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누구인지, 왜 살아가는지에 대한 문제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수수께끼였다. 배진수 작가와 임진국 작가의 웹툰 는 바로 이 수수께끼를 다룬다. 대담하게도 에서는 모든 생명체는 모습을 바꾼 신이며 삶에 대한 투쟁 또한 신이 자신의 발전을 위해 설계한 것이라 못을 박고 시작한다. 이러한 죽음의 공포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인류는 비토피아라는 인터넷 기반의 가상 공간에 이주한다. 이때 현실에 남은 마지막 인간인 노교수는 눈 앞에 강림한 신에게 질문 하나를 던진다.

 


            “자네 말대로 나와 우리, 인간과 신, 그 모든 게 같은 뜻이라면. 그렇다면 반대로 나 또한 하나의 우주, 한 명의 신이 될 수도 있다는

            말과 같지 않은가?”

이 대사에서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이 들리는 것 같지 않은가? 서양 철학사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끊임없는 시도이기도 했다. 이 점에서 신을 자처한 노교수는 니체 이후의 철학사를 관통하는 인본주의 그 자체이다.


           한때 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그 설계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로 여겨졌던 시대가 있었다. 바로 중세 철학의 시대이다. 중세에서 철학은 신학의 일부로만 다뤄졌으며, 인간과 세계에 대한 탐구 또한 궁극적으로 신으로 향하는 길로 여겨졌다. 중세의 대표적인 기독교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은 이러한 경향성을 뚜렷이 반영한다.

“인간은 [...] 신의 은총에 의해 더 고귀하거나 신학적인 덕, 즉 믿음, 소망, 사랑을 얻게 됨으로써 자신의 초자연적인 목적으로 향하게 된다.” (1)

아퀴나스는 인간의 궁극적인 본능은 바로 신을 추구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이 본능을초자연적 목적이라 칭함으로써 이 본능을 따르는 것이 인간의 목적이라 규정한다. 그리고 이를 성취하는 것은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의 비토피아는 얼핏 보기에 자연의 섭리인 죽음을 인간의 힘으로 초월했다는 증거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품 초반부터 제시되었듯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에 집착하는 것 자체가 신의 설계이다. 따라서 일견 인간의 승리처럼 보이는 비토피아는, 아퀴나스의 철학에 빗대어보면 철저히 신의 설계에 따라 신의 의도대로 행동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을 독대한 노교수는 신이 지어놓은 한계를 뛰어넘고 스스로를 신으로 천명한다. 그런 노교수의 행동은 니체의신은 죽었다라는 선언과 정확히 일치한다. 니체가 한 이 선언의 뜻은 인간을 태생부터 한계짓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혹은 죽었으며-,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은 다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닌 오로지 인간 자신을 위해 추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초인 (overman)이다. 초인이 초월한 것은 절대적 규범으로 존재하는 신이다. 죽은 신 대신 자신의 규칙을 따라 삶을 개척해나가는 초인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이며, 역동하는 삶에 대한 긍정 그 자체이다.


           이 점에서 에서의 노교수는 죽음의 공포에 쫓겨 맹목적으로 비토피아를 건설한 다른 인간들과 다르다. 그는 삶과 죽음의 의미를 파헤치며 평생을 보내온 학자이다. 그를 따르던 제자조차도 비토피아를 선택하는 마당에도 노교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합류를 거부하고 생명의 의미는 무엇일지, 신의 뜻은 무엇일지를 고민한다. 그런 노교수가 신학자로서 신의 뜻을 탐구했다는 점에서는 다소 아이러니한 맛이 있다. 그러나 노교수는 죽음의 공포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답을 찾아 평생을 연구해온 학자이다. 그러한 치열함을 평생토록 지녀왔던 노교수는 마지막 순간 신의 말을 듣고 거기서 인간의 가능성을, 신을 넘어설 가능성을 깨닫는다. 이런 점에서 노교수는 바로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라 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이렇게 인간으로의 회귀를 외쳤던 니체의 사상에 중대한 영향을 받은 철학자이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그저 고통과 슬픔의 연속일 뿐인 삶"에 내던져진 존재 (projected being)라 말한다. 마치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인간의 삶은 고통이며,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의미없음이 (...) 인류에게 내려진 저주” (2) 라 말한 것처럼, 사르트르 또한 인간의 삶에 따라붙는 고통과 공포에는 어떠한 이유도 목적도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르트르에게 있어 이 무의미함이 인간의 삶을 부정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인간은 왜 태어났는지, 왜 살아가는지에 대해 어떠한 선험적 이유도 없이 세상에 밀려나온다. 그 말은 반대로 우리 자신 외에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을 대신 정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고통과 슬픔의 연속 안에서도 삶의 목적을 스스로 빚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I think, therefore I am)라는 명제에 대치되는, '존재는 본질을 앞선다' (existence precedes essence)라는 사르트르의 유명한 주장이 나온다.


           신이 정한 존재의 이유를 벗어던진 노교수처럼, 영화 <블레이드 러너> (1982)에서도 자신의 실존을 스스로 증명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 모든 순간들이 금세 사라질 거야. 빗속의 눈물처럼, 죽을 시간이야>

전투용 인조 인간인 로이 베티는, 탄생부터 자신에게 부과되었던 전투 로봇으로서 인간을 도우라는 삶의 목적을 거부한다. 누군가의 도구 이상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으로, 그는 동료들을 잃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탈출을 감행한다. 마지막 순간 로이 베티는 동료를 죽인 형사인 데커드에게 복수하길 포기한다. 오히려 데커드의 목숨을 구하고 죽음을 택하고야 만다. 그의 마지막 순간에는 오롯이 스스로가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살아가려는 로이 베티의 의지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의 노교수와 마찬가지로, 로이 베티는 자신에게 부과된 삶의 목적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이유를 치열하게 추구해왔다. 자신의 본질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사르트르의 인간론에 비춰본다면, 로이 베티는 인조 인간임에도 그 누구보다 인간다운 인물이다.

          


           웹툰 는 인터넷 기술이나 진화론 등의 과학적 요소를 소재로 차용했다. 그러나 끊임없이 의심하고 나아가고자 하는 인간을 그렸다는 점에서 지극히 인문학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된다는 이 서사는, 사실상 서구 철학사조가 흘러온 방향 그 자체이다. 니체는 인간의 주권을 신에게서 빼앗아 인간에게 돌려놓으려 했다. 사르트르 또한 처음부터 삶의 의미를 점지해주는 절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내던져진 세상 속에서 자신만의 삶의 이유를 찾는 것이야말로 유의미한 것이라 주장한다. 웹툰 는 철저히 인간에 대해 말하는 작품이다. 마지막 컷의 눈 두 쌍의 인간은 바로 신을 죽이고 그 빈 자리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나가는, 실존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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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세뮤얼 이녹 스텀프, 제임스 비저. 열린책들. 2004. 

(2) 어떻게 살 것인가: 세상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 고은. 21세기북스. 2015.

(3) 블레이드 러너, 라들리 스콧. 워너브라더스.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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