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인문학도가 읽는 웹툰 ③ <안녕! 후식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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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ssida
2018-02-24 10:19:37
조회수 : 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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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웹툰 <안녕! 후식맨>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이 글에 사용된 이미지의 저작권은 원작자에 있습니다. 원작자의 요청이 있을 시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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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툰 <안녕! 후식맨>의 주인공인 김조는 평범한 공익근무요원이자 무명 만화가이다. 우주선에 끌려가 후식맨으로 변신하는 능력이 생긴 후에도 그의 평온한 일상에 특별한 변화는 없다. 그러나 소행성 반반무마니가 지구로 날아오기 시작하면서, 김조는 이전처럼 일상에 쉽게 녹아들 수 없게 된다. 반반무마니가 지구로 날아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정부도 직장 동료들도 지구를 비껴갈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만을 하고 있다. 그러나 후식맨으로 각성(?)한 김조는 그 능력은 반반무마니를 막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 여기며, 다른 사람들처럼 낙관론에 마냥 빠져들 수 없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저 소행성에 대한 SF 물로만 읽을 수 없다. 왜냐하면 <안녕! 후식맨>에서는 소행성 반반무마니에 대한 김조의 갈등뿐만 아니라 작품활동을 하면서 김조가 겪는 예술가로서의 고뇌가 대등한 분량으로 다뤄지기 때문이다. 얼핏 보기엔 반반무마니에 대한 책임감으로만 보이는 독백을 하던 김조는, 13화에 들어서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에 대해 독백을 하던 중 후식맨으로서의 자신을 마주한다. 



<작품에 대한 독백을 하다 후식맨을 마주한 김조>

이는 후식맨으로서의 정체성이 그저 반반무마니를 막을 영웅으로서의 모습뿐만 아니라, 예술가로서 규범과는 다른 시각을 지니고 작품을 통해 그 다름에 대해 증거해야 하는 김조 자신의 갈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예술을 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김조는 왜 후식맨을 받아들이길 망설이고 두려워했던 것일까.  


        프란츠 카프카는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고 했다. (1) 이 말은 비단 책 뿐만이 아니라 예술 자체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를 시사하고 있다. 예술가들은 사회규범과 역동하는 인간의 삶 사이의 간극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해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틈새를 작품 안에 녹여내어 규범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설득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은 규범 안에서 안주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식의 전환을 통해 삶의 이면을 들여다볼 기회를 준다. 우리는 사회 안에서는 그저 누군가의 가족이자 어느 회사의 직원으로만 여겨진다. 하지만 예술이 가져다주는 낯섦은 사회가 부여한 정체성 이전에 있는 날것의 자아를 발견하게끔 만든다.


그런데 예술을 하는 데 있어서도 치뤄야 할 대가가 있다. 먼저 하고 싶은 사업이 있어 공익근무를 시간낭비라 여기는 동료에 대한 김조의 감상을 보도록 하자. 



김조의 동료처럼 자신의 삶에 확고한 목표의식이 있는 이에게는 그 목표의식이 삶에 있어 강력한 추진력이 된다. 하지만 그 추진력은 목표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쉽게 외면하고 무시하게 만들기도 한다. 김조는 이 자기 확신을 “내면 속 광휘”라 부르며, 그 광휘가 만들 그림자의 존재를 함부로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자신이 하려는 일 -예술가로서 작품으로 자신의 시선을 증거하는 일- 또한 그런 종류의 그림자를 드리우리라는 것을 김조는 알고 있다. 새로운 시선을 던진다는 일은,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 체제의 모순을 소리 내어 지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적은 그 체제 안에서 몸담고 살아가는 이들을 부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 인간이 홀로 체제에 맞서는 것은 얼마나 고독하고 두려운 일인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소송>은 체제에 반한 개인이 얼마나 혹독한 고통을 겪는지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시이다. <소송>의 주인공 요제프 K.는 이유조차 모를 소송을 당한다. K는 법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관료주의 체제 앞에서 너무나도 무력하다. 어떤 것에서도 구원받지 못한 그는 차라리 사형당하길 택한다. (2) 마찬가지로 김조에게도 비슷한 무기력을 읽어낼 수 있다. 먼저 후식맨이라는 능력은 마치 K가 어느날 갑자기 소송을 당한 것처럼 뜬금없이 우주선에 납치되면서 생겼다. 그런 김조는 영웅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재난을 당한 일반인이다. 그리고 K가 소송 앞에서 그러하듯, 후식맨으로서의 능력도 반반무마니를 막기엔 터무니없이 무력하다. 즉, 김조에게 있어 예술가로서의 자각은 삶에 갑작스레 닥쳐와 사회의 무도한 폭력에 자신을 무방비하게 노출시키는 부조리이다. 이 황망함을 김조는 “왜 하필 나였을까. 이것만은 알려주세요. 왜 하필 나였습니까?”라 토해낸다.




그러한 무기력과 공포에 시달리면서도 김조는 만화 그리기를 한순간도 놓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만화조차도 큰 이목을 끌지 못한다. 아무도 봐주지 않을 만화를 그리는 외로움에 시달리며, 김조는 자신의 작품활동을 독백일 뿐이라 말한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언어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문제를 다루며 언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다고 말한다. 언어에는 바로 그 언어를 말하는 화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3) 증언한다는 것은 증언의 내용이나 해석 이전에 말하는 이의 존재를 드러내준다. 만화 그리기에 뒤따르는 그 모든 버거움에도 김조가 차마 작품활동을 놓을 수 없었던 까닭은 여기에 있다. 예술가는 증언을 통해, 즉 작품활동을 통해서만 실존하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작품활동은 내가 여기 있다고, 내가 보는 시선이 이렇다고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외치는 부르짖음이다.


<안녕! 후식맨>의 전개가 결말로 치달을수록 소행성 반반무마니와 후식맨에 대한 비유는 점점 추상적인 영역으로 빠져든다. 그래서 반반무마니는 지구와 충돌했는가? 김조는 후식맨을 용납할 수 있었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반반무마니 위에서야 김조는 후식맨과 마주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를- 혹은 김조가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한 장면에서 언급된 시를 보자.



반반무마니에서 지구를 바라보며 김조는 앞서 고민해왔던 “피해주고 싶지도, 도망치고 싶지도 않다”는 모순된 마음, 그리고 그 모순이 결국 나쁜 사람이 되기 싫은 욕심일지 모른다는 문제를 떠올린다. 그리고 자신이 겪는 그 문제가 결국 다른 70억 개의 감정 중 하나이며 그 안에서 상호작용하며 지구의 “무심에 가까운 절대적인 순수함”을 이루는 요소로 받아들인다. 그토록 김조를 괴롭혔던 문제 역시 멀리서 보면 인간사의 한 면모로서 한없이 긍정될 수 있다. 이 긍정 안에서 김조는 후식맨을 더 이상 “영혼의 짐” 삼지 않고 진정으로 포용한다. 


김조가 후식맨을 받아들임으로써 일어난 “정화”는 가장 먼저 김조 자신에게 변화를 일으킨다. 한때 후식맨을 부정하려는 과정에서 생겼던 깊은 내상은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김조는 그 내상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내면의 상처를 담담히 마주하는 김조>


김조가 결국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끌어안고 성장했다는 점에 빗대어봤을 때, 길거리의 행인들이 고양이로 변하는 장면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해변의 카프카>의 등장인물인 나카타 상에 대한 오마주로 해석할 수 있다. (4) 고양이와 대화를 할 수 있는 기묘한 노인이 호시노 상에게 회사와 밥벌이 너머에 있는 삶의 가능성을 일깨워준 것처럼, 예술가 김조 또한 자신의 작품을 통해 현실 속에 매몰된 이들에게 새로움을 건네줄 것이다. “낯선 이의 아이를 정화”할 것이다. 



<고양이로 변하는 행인들>





“일체의 글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글만을 사랑한다. 글을 쓰려면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넋임을 알게 될 것이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5)

글은 피로 쓰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 가장 고유한 자로서의 자신을 드러내는 글은 오로지 피로써만 쓰여진다. 김조가 거쳤던 그 모든 고민과 방황이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것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어려있기 때문이다. <안녕! 후식맨>은 그런 김조의 피로 그려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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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프카 단편집, 프란츠 카프카. 권혁준 역. 지식을만드는지식. 2013.

(2) The Trial, Franz Kafka. Penguin Classics. 2000.

(3)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조르조 아감벤. 정문영 역. 새물결. 2012. 

(4) 해변의 카프카, 무라카미 하루키. 김춘미 역. 문학사상. 2003.

(5) 니체 전집. 13: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정동호 역. 책세상.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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