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인문학도가 읽는 웹툰 ① <인간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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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ssida
  ( 2018-02-10 10:38:11
조회수 : 1,201 )
2018-02-10 10:3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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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웹툰 <인간의 숲>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이 글에 사용된 이미지의 저작권은 원작자에 있습니다. 원작자의 요청이 있을 시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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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툰 <인간의 숲>에서 주인공 하루는 비밀스러운 시설에 신입 연구원으로 들어가게 된다.이 시설은 원래대로라면 사형이 집행되었을 연쇄살인범들을 연구목적으로 수용한 곳이다. 그러다  사고로 사형수들이 풀려나게 되면서 하루는 그 안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고군분투한다. 사이코패스의 심리구조에 대해 면밀히 조사를 한 황준호 작가의 장인정신이 빛나서일까, 이 작품에 대한 감상을 접하다 보면 사형수 김혜선의 합리화에 설득당했했다는 반응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김혜선은 인간의 도덕이라는 것이 맥락에 따라 얼마나 쉽게 변하는지, 따라서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기엔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 역설한다.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지적이다. 그녀의 말대로 우리가 몸담고 사는 사회에는 다른 가축은 먹어도 되는데 개는 안 되고, 개는 먹어도 되는데 인간은 안 된다는 식의 서로 모순되는 가치관들이 혼재하기 때문이다. 김혜선의 지적대로 인간의 도덕이 절대적이지 않다면 김혜선을 비롯한 다른 사형수들의 살인행각은 합리화될 수 있을까. 또 살해당한 아버지와 연인의 복수를 하려는 하루는 과연 정당한가.


        김혜선과 김교수는 시설에 수용된 사형수들 중 누가 가장 최악의 악인일지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강기환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자연재해처럼 닥쳐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다. 김경식은 오로지 고문만을 하고 싶어한다. 최대한 오래 고문을 하고 싶어 하기에 고문 대상이 죽는 것은 김경식 자신조차도 원하지 않는다. 박준호는 견실한 법조계 청년으로 위장한 채 사람들 사이에 위화감 없이 녹아들어 사람을 죽인다. 누가 가장 악한 이인가? 분명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이다. 더욱이 이 모호함은 자신을 지킬 무기를 찾던 하루와 박재준의 대화에서 다시 한번 강조된다.



<모두가 그러해서 당신도 그러한 것... 선악이란 게 그 정도 입니다.>

        모두가 그러하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선악이라는 박재준의 지적에는 도덕에 대한 유의미한 통찰이 담겨있다. 윤리적 상대주의의 관점에서는 도덕관이라는 것이 다수의 합의에 의해 정해졌고, 따라서 유동적이라 말한다.
        “[...] 우리의 모든 도덕적 태도와 판단은 사회환경으로부터 습득한 것이다. 심지어 정의와 인격에 대한 우리의 뿌리 깊은 확신도 [...] 우리의         문화권에서 내면적으로 투사된, 또는 내면화된 견해이다.” (1)
이 점은 하루 자신도 사이코패스에 대한 수업을 들으며 고민하기도 했던 내용이다. 하루는 자신 또한 사람을 도구로 대했고 가면을 써왔다며 그들과 자신이 얼마나 다를 지에 대해 생각한다. 


<타인을 대할 때 가면을 쓰는 하루>

하루의 삶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사회 안에서 다른 이와 상호작용을 할 때에는 필연적으로 폭력이 뒤따른다. 하루의 경우에는 그것이 부모님의 이혼 소식에 공감하지 못하거나 감정을 꾸며내는 가면을 쓰는 정도로 표출된다. 그러나 작중 사형수들의 경우에는 이 폭력이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도덕이 상대적이라는 사형수들의 지적은 이 맥락에서 타당하다 할 수 있다. 하루도 사형수들도 타인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똑같이 상해를 입힌다. 그들 사이의 차이는 그 폭력이 얼마나 크고 작은지에 대한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그런데 법의 존재는 이 모호한 정도의 차이 위에 이분법적 선을 긋는다. 법은 그 규율에 따라 유죄, 혹은 무죄라는 판단 아래 하루와 사형수들을 구분짓는다. 이때 법의 이러한 이분법은 바로 작중에서 언급되는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선이 된다. 왜냐하면 법은 사회가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규칙을 명문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최초의 법이라 할 수 있는 자연법은 “[...] 너와 나의 사회적 관계를 평화 속에 정립하여 공존을 실현시키려는 방법으로 탄생”(2)하였다. 따라서 이 법을 어긴다는 것은 인간 사회 안에서 공존하며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사형수들의 주장대로 도덕은 상대적이며 가치판단의 절대적 기준이 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법은 사회의 존속을 위한 최소한의 규칙이며, 이를 어기면 더 이상 인간으로서 사회 안에서 상호작용할 수 없다.

        하루는 세상에 살인마를 풀어놓을 수 없다며 폭발하는 건물 안에서 김혜선, 박준호와 함께 죽으려 든다. 김혜선은 그런 하루에게 인간이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냐고 묻는다.


<인간이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나요?>

이에 하루는 아버지와 연인의 복수를 준비하는 장면에서 “아니요. 인간은... 죄를 짓고 살 수밖에 없지요. [...] 나를 죽이고 싶죠? 다 알아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나도 당신들을 죽이고 싶으니까요.” 라 대답한다.



앞서 언급했듯 도덕의 기준은 상대적이며 맥락 의존적이다. 따라서 하루는 살아가는데, 또 복수를 하는데 필연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하루는 박준호와 김혜선이 을러대었던 것처럼 그 둘을 살해함으로써 그들과 똑같은 인간이 되지는 않는다. 대신 김혜선의 얼굴을 난도질해놓고 박준호를 거세시킴으로써 자신의 복수를 이행한다. 이는 복수에 대한 도덕적 죄는 스스로 감당하되 법의 테두리 안, 즉 인간의 테두리 안에 남으려는 하루의 적극적인 의지이다.


<하루의 명대사로 꼽히곤 하는, ‘회개하면 돼’.>

        하루는 상대적인 도덕의 잣대에 길을 잃지 않고 인간 사회 안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적극적으로 찾아내는 강한 의지가 있다. 칸트 철학에서는 이 의지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라 말한다. 
        “’악에 대한 성향’, 곧 ‘근본악’은 인간의 본성 안에 뿌리 깊이 박혀 있다”. 
        “우리는 경향성의 존재에 대해서 책임을 질 필요가 없지만 [...] 악의 성향은 주체의 도덕과 관련되어 있고 [...] 스스로 죄를 초래한 주체에게         책임을 돌릴 수 있다.” (3) 
이 말은 악에 대한 경향성이 존재하는 것과는 별개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존재하며, 따라서 인간은 도덕적 주체로서 자신이 따라야 할 준칙을 스스로 세우고 정립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 사형수들이 내면의 악에 대한 경향성에 굴복하여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그들을 동물이나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추락시킨다. 그러나 하루는 자신의 복수와 사회규범이라는 두 가치를 저울질하고 후자를 존중한다는 적극적인 가치판단을 한다. 칸트에 따르면 이러한 가치판단이야말로 하루를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경계를 넘지 않기로 선택한 하루>

        황준호 작가는 “인간의 영혼은 어두운 숲”이라는 구절에 착안하여 작품의 제목을 <인간의 숲>으로 지었다고 한다. (4) 사이코패스들의 비인간적인 살인행위를 주로 그리는 그의 작품은, 역설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던진다. 가장 비인간적인 무언가를 바라볼 때 인간의 경계는 어디까지인지가 비로소 명확해지는 것이다. 하루는 그런 비인간성을 목격하고도 인간으로 남으려 치열하게 노력하는 실존적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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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 생활윤리, 전영길. 한국문학사. 1993.
(2) 자연법 사회 윤리, 강두호. 인간사랑. 2003.
(3) 도덕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강영안. 조합공동체 소나무. 2000.
(4)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5457&cid=59121&categoryId=59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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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ss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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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1
    애니시
    (2018-02-14 09:09:31 )
    인간의 숲 재밌죠! 요즘 재연재때문에 다시보는데도 재밌더라구요. 새로 만들어지고 있는 2부도 재미있고 ㅎㅎ
    추천작 중 하나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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