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 리뷰
생각할수록 대하 인간군상극, 『피너츠』
by 관리자
2017-10-13 11:42:41



『피너츠』 시리즈 국내 출간본들

 


하나의 만화 작품이 한 작가에 의해 50년 동안 매일 새로 연재되면서, 비평적으로도 대중적으로도 세계적 성공을 거두는 성공스토리가 있다. 1950년에서 2000년까지 17,897편이 만들어지고, 그동안 2600여개 신문에 배급 연재되었고, 75개국 3억5천만명의 독자들과 만났으며, 21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동안 수많은 후속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상업적으로도 책 자체든 라이센스 상품이든 엄청난 파급력을 거두었으며, 애니메이션 등 다른 장르로 이식된 것도 사람들이 매년 다시 찾아보는 살아있는 고전으로 남았다. 예리한 성찰을 담아내기도 해서, 진지한 인문학 서적에서도 종종 에피소드들이 인용된다. 찰스 슐츠의 『피너츠』가 지금까지 남긴 기록이다.


 


스누피, 찰리 브라운, 캐릭터의 힘


『피너츠』의 매력은 크게 두 가지 축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는 스누피가 중심이 되는 동물 캐릭터 유머고, 다른 하나는 찰리 브라운이 중심이 되어 펼치는 아이들의 세계다. 작품의 제목인 피너츠는 아이들을 통칭하는 것임에도, 찰리 브라운의 비글 강아지인 스누피의 매력이 이 시리즈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스누피는 작가가 되어 글을 쓰는 것과 동시에 자기 작품 속의 여러 상황에 처하는 꿈을 꾸고, 개집 위에 드러누워 명상을 한다.


스누피는 세상사에 대한 분방하고 엉뚱한 통찰을 직언으로 펼쳐내되, 기본적으로 인간사에 크게 개입하지 않는 개의 위치에 있다. 물론 강아지라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룸펜 철학자의 매력과 세상에 대한 관조적이고 낙천적인 유쾌함이 듬뿍 묻어난다. “넌 중요하지 않아. 거대한 우주의 작고 작은 티끌일 뿐이지”라고 누가 쏘아붙일 때, “그럼 그냥 다시 잠이나 자도 되겠구나”라고 홀로 생각하는 것이 스누피다. 귀여운 그림의 매력까지 합쳐지며, 거의 작품의 얼굴마담에 가까울 정도로 독보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피너츠』 중에서

 


하지만 더 복합적이고 본격적인 매력은 역시 찰리 브라운과 친구들의 이야기다. 주인공인 찰리 브라운은 자기 강아지 스누피의 반대말 같은 존재다. 매사에 비관적이고, 자존감이 낮고, 난처한 상황을 정말 난처해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운동도 공부도 대인관계 재능도 어떤 것 하나도 딱히 탁월한 구석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럭저럭 다른 동료들과 함께 지내며 우정을 나누고 구박을 받는 꼬마다. 그의 주변에는 활달하고 공격적이며 엉터리 심리상담사 놀이를 즐기는 루씨 반펠트가 있고, 찰리의 가장 친한 친구지만 담요에 대한 애착을 끊지 못해서 늘 들고다니는 라이너스 반펠트 남매가 있다. 그리고 핵심 삼인방 너머로 온갖 인물들이 일방적 애정관계로 연결되어 있는데, 찰리의 동생이자 매사에 호기심이 차고 넘치며 라이너스를 좋아하는 샐리 브라운, 찰리를 좋아하는 터프한 여걸 페퍼민트 패티(파트리샤 라인하트), 루씨의 노골적인 구애를 무시하느라 바쁜 피아노 소년 슈뢰더 등이 있다. 여기에 프랭클린, 마시 등 ‘사이드 킥’ 스타일의 인물들이 한 층위 있고, 여타 관계로 얽힌 이들이 추가된다.


이렇듯 『피너츠』는 현대사회의 온갖 사회적 상황들, 특히 상호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다만 우리들이 겪는 여러 사회관계들을 촘촘하게 아이들의 놀이 세계로 옮겨놓는 환경을 마련했을 따름이다. 우울하고 비관적 생각으로 가득한 아이, 그에게 의지할만한 우정을 제공해주지만 정작 자신은 유아기의 어떤 애착조차 벗어나지 못한 아이, 친구의 징징거림에 대해 구박을 하는 억센 역할을 하지만 자기 사랑에 있어서는 조금도 진전을 보이지 못하는 아이가 중심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만만치 않다. 이렇게 아이들은 공터를 중심으로 한 자신들의 세계에서, 사람과 사회와 세상에 대한 우화를 펼친다. 짧은 호흡의 개그 코믹 스트립이라는 형식적 측면이 아니라 내용으로 따져본다면, 수많은 인물들의 복합적 관계가 오랜 기간 동안 (작품 속에서는 시간이 흘러가며 아이들이 성장하지는 않지만) 펼쳐지는 대하 인간군상극이다.


 


『피너츠』 1회 원고. 『피너츠』는 1950년 10월 2일에 연재를 시작했다. 《워싱턴 포스트》《시카고 트리뷴》《앨런타운 콜 크로니클》《덴버 포스트》등 지역 유력 일간지 일곱 군데에서 동시에 『피너츠』를 볼 수 있었고, 네컷 만화 포맷은 1952년까지 유지되었다고 한다.

 



반세기를 이어온 건강한 이야기의 힘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기발한 한 마디나 뒤집어지는 반전의 유머에 의지하지 않고, 다양한 관계에 있는 캐릭터들이 특정한 상황에서 대처하는 모습 자체로 승부한다.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대처를 반복하는 현대 사회의 시지프스들이, 그 상황을 가장 절묘하게 압축해내는 통찰을 종종 어렵지 않은 말이나 대처행동으로 표현해낸다. 가장 대표적인 반복되는 상황 가운데 하나는 찰리의 미식축구 킥인데, 찰리는 자신이 공을 차는 것에 재능이 없다고 한탄하며 회피한다. 그런데 루시가 찰리로 하여금 적극적 사고를 가지고 연습을 해보도록 설득을 한다. 루시는 공을 자리에 붙잡아주고, 찰리는 달려온다. 그런데 공을 차기 직전에 루씨는 공을 치워버리고 찰리는 헛발질을 해서 넘어진다. 액면 상으로는 사소한 장난일 텐데, 그 안에는 도전의 계기, 용기를 준다는 것, 반복되는 좌절에 대한 묘한 역설이 가득하다. 이렇듯 이 작품은 현대인의 여러 모습들과 아이들의 순박함을 마법처럼 적절하게 녹여내며, 가볍게 귀여운 유머로 즐기고픈 이들에게나 좀 더 절묘한 세상사 우화를 느끼고 싶은 이들에게나 모두 큰 만족감을 준다.


작가 찰스 슐츠는 다양한 캐릭터들을 만들어내면서, 자신의 여러 일면과 가족, 주변인들을 모델로 종종 채택했다고도 한다. 예를 들어 찰리를 구박하는 루시가 작가의 첫 부인을 참조해서 만들어졌다든지 말이다. 게다가 오랜 기간 동안 매일 연재하다보니 스스로의 인생 상황이 녹아들어가서, 70년대 초에는 자신의 불륜과 이혼 및 재혼과정의 심경이 반영되어있다고 분석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듯 『피너츠』는 모두가 건강한 장난꾸러기들인 쾌활한 세계가 아니라, 우울하고 좌절하고 신경질적이고 무관심하고 일방적 애착을 못 버리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작은 현대 사회다. 그것을 한 발짝 멀리서, 신랄하지 않되 절묘하게 은유되도록 수위를 맞추고, 유머와 귀여움으로 무장시켜서 재미를 주는 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물론 50년이나 하다 보니 그 안에서 부침은 있다. 심오한 사회적 갈등의 에피소드들도 많지만, 말기로 갈수록 스누피의 그럴듯한 표어로 넘어가려는 매너리즘도 상당히 있다. 하지만 전체적 그림으로는 놀랄 만큼 품질이 일관적이다.


 


타임》지 커버를 장식한 『피너츠』.

‘THE WORLD ACCORDING TO PEANUTS(『피너츠』가 보여주는 세상)이라는 표제가 붙었다.

1965년 4월 9일자 발행.

 


2015년 현재 『피너츠』는 미국의 유명한 대안만화 출판사인 판타그래픽스에서 50년 어치 전체를 25권으로 묶는 전집 프로젝트가 거의 완간 막바지에 도달했다. 그 전에 2015년 겨울에 새 극장판 애니도 개봉하는 등, 한 번도 인기가 사라진 적이 없지만 다시금 큰 붐이 일어날 모양새다. 그저 귀여운 작품이 아니라, 세상사의 맛을 담아내고 귀여운 작품의 저력이다.



출처: 에이코믹스 https://acomics.webtoonguide.com/archives/31742
윤태호 작가님 감사합니다.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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