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려하고 확장성이 좋은 <닐 게이먼>의 '환상'
by 김봉석
2018-09-04 14: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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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출신의 닐 게이먼은 그동안 휴고상, 네뷸러상, 브램스토커상, 로커스상을 비롯하여 최고의 아동문학에게 수여하는 뉴베리상, <닥터 후> 시즌 6의 에피소드 4 ‘The Doctor's Wife’로 휴고상의 최고 단편 드라마 (Best Dramatic Presentation, Short Form) 부문을 수상했고, 최고의 만화에게 주어지는 아이스너상도 수차례 받았다. 만화, 소설 등을 망라한 당대 최고의 이야기꾼이라고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는 경력이다. 국내에 나온 책도 SF, 판타지, 영어덜드, 환상동화 등을 넘나드는 <신들의 전쟁> <멋진 징조들> <스타더스트> <베오울프> <원더월드 그린북> <그레이브야드 북> 등과 그래픽 노블 <샌드맨> 시리즈와 <배트맨:망토 두른 십자군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등이 있다.


그런데 국내에서 닐 게이먼의 이름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소설이나 만화가 많이 팔린 적도 없다. 이유는 무엇일까. 해외에서 장르에 치중한 소설을 쓰면서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누리는 서양의 작가는 많지 않다. 성경보다 많은 부수의 판매를 기록한 스티븐 킹조차도 한국에서는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니다. 근래 중단편집이 조금 팔리기는 하지만 해외의 인기에 비할 바가 아니다.


1947년생인 스티븐 킹은 1976년 <캐리>로 데뷔했고, 1960년생인 닐 게이먼은 1984년에 듀란듀란의 전기를 썼고, 만화 스토리작가로는 1986년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10년의 차이가 나기도 하고, 스티븐 킹은 <캐리>가 소설만이 아니라 영화로서도 대성공을 거두면서 데뷔작부터 일약 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샤이닝> <데드 존> <쿠조> <공포의 묘지> <미저리> 등 공포물에 이어 <스탠 바이 미>와 <쇼생크 탈출>, <돌로레스 클레어본>, <그린 마일> 같은 휴먼 드라마도 영화화되어 대중의 인기를 누렸다.



닐 게이먼이 처음 인기를 얻은 것은 만화 스토리 작가였다. DC에 들어간 닐 게이먼은 <샌드맨>의 이야기를 맡았다. 성인용 레이블인 버티고에서 출간된 <샌드맨>은 1990년대 최고의 그래픽 노블이었다. 꿈을 창조하는 샌드맨은 단순한 슈퍼히어로가 아니었다. 닐 게이먼은 <샌드맨>에 인간이 그동안 경험하고 만들어낸, 혹은 미지의 세계와 결합된 모든 종류의 환상을 이야기 속에 담아냈다. 신화와 전설, 민담, 악몽과 환상 등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영역이 펼쳐진 또 하나의 세계. 꿈을 관장하는 샌드맨의 누이가 ‘죽음’이라는 것은 그런 점에서 흥미롭다. 꿈과 죽음,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결코 정복할 수 없고 완벽하게 이해할 수도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닐 게이먼은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닐 게이먼의 소설도 다채롭다. 이민자들과 함께 신대륙에 온 신들이 현대에 새롭게 태어난 신과 전쟁을 벌이는 <신들의 사회>, 적그리스도가 되야 할 소년이 미국인 외교관의 아들이 아니라 엉뚱한 곳에 태어나 고군분투하는 풍자소설 <멋진 징조들>, 인간이 갈 수 없는 금기의 땅 스톰홀드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우면서도 잔혹한 판타지 <스타더스트>, 유령들에게 길러진 노바디의 유쾌한 성장담 <그레이브야드 북> 등등 ‘환상’이라는 키워드로 묶을 수 있는 닐 게이먼의 작품을 읽는 일은 언제나 설렌다. 기발하고 독창적인 이야기가 영국식의 뒤틀린 유머와 잔인할 정도의 현실인식과 어우러져 달콥쌉싸름한 여운을 남긴다.



또한 배트맨의 죽음을 만들어달라는 DC의 요청을 받은 닐 게이먼은, <크리스마스 캐롤>의 스쿠루지 영감처럼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배트맨의 장례식을 <배트맨:망토 두른 십자군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에 담아낸다. 배트맨, 브루스 웨인의 장례식에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이 찾아온다. 알프레드 집사와 고든 형사, 캣우먼부터 조커, 리들러, 펭귄맨 등등. 그리고 한 명씩 자신이 아는 배트맨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가 왜 배트맨이 되었는지, 그가 어떤 슬픔과 고뇌를 간직했는지, 그가 어떤 순간에 흔들렸는지 등등을.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다르고, 배트맨의 수많은 얼굴이 동등하게 드러난다. 수 십 년을 거치면서 성장하고 굴절된 캐릭터의 모든 것을 담아내면서도, 신화와 전설의 요소를 다시 투영하여 ‘배트맨’이라는 거대한 존재, 대중이 열광적으로 사랑하는 영웅의 모든 것을 담아낸다. 단 한권으로.


아직 닐 게이먼에게 부족한 한 가지가 있다면, 영화에서의 성공이다. 한때 스티븐 킹의 라이벌로 불렸던 딘 쿤츠에게도 부족한 것도 ‘영화’였다. <캐리>와 <샤이닝>을 영화로 본 관객들은 스티븐 킹의 선연한 공포에 매료되었다. 그 이미지는 소설보다 강력했다. 닐 게이먼의 <스타더스트>는 흥행에서 실패했다. 최고 걸작인 <샌드맨>은 아직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닐 게이먼의 환상에 매료된 이들은 기꺼이 그의 책을 다시 읽지만, 아직 영화에서 넘어오는 이들은 거의 없다. 특히 닐 게이먼이라는 이름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의 독자들은. 하지만 일단 닐 게이먼의 책을 집어 든다면 빨려든다. 스티븐 킹의 ‘공포’보다 닐 게이먼의 ‘환상’은 유려하고 확장성이 좋다.

김봉석
Que Sera Sera! 2017 부천영화제 프로그래머, 만화 웹진 에이코믹스 前 편집장, 익스트림무비. 나의 대중문화표류기,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전방위 글쓰기, 컬처매거진 브뤼트. 평론가라기보다 애호가. 주로 좋아하는 것들을 보고 듣고 쓴다.
만화와 영화 양쪽 분야의 전문가로 활발한 대외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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